보풀제거기
2023년 8월 13일 일 오전 10:36
사랑이 익숙한 26번 좌석에 앉아 이 시대에는 역할이 다한 영사기를 두드린다. 지나치게 익은 수박 내지는 한 철 질기게 오던 빗소리 같은 울림, 기억이 잘 늙어가고 있다. 잘 말려있는 필름을 펼쳐보면 어떤 것은 나 같고 어떤 것은 낯선 이 같다. 사실 그다지 낯설지는 않고 왜 저랬나 싶다. 한 철에는 지독하게 스스로를 검열하며 살고, 또 다른 철에는 어떻게 보이기를 멈추고 산다. 마음의 모순은 보풀처럼 거슬린다.
사람은 기억한다. 기억은 내가 강렬히 원했던 그 감정을 따라가게 한다. 돌아가고 싶다가 아닌, 돌아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잠겨 마치 그때의 내가 진짜고 지금의 나는 가짜인 기분에 사로잡히면 오늘은 과거를 데우기 위한 땔감이 된다. 그리고 어느샌가 습관처럼 타버린다. 그러길 멈춘 이유도 큰 결심이 있었던 게 아니다. 과거와 현재의 괴리가 거슬린다는 그 기분이 거슬려 덮어두었을 뿐이다.
그렇게 기약 없는 타임캡슐을 만들고 꺼내보려는 별다른 노력도 안 했지만 어느샌가 문제는 해결되었다. 지금을 느끼며 살아가면 지금의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인들의 삶을 하나의 잣대로 관통해 나누는 일로는 그의 시간을 움켜쥘 수 없듯이, 나를 끌어안기 위해서는 오늘 내게 있는 감정에 팔을 담가봐야 했던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이제는 열정이 식은 것, 싫었는데 나쁘지 않은 것, 여전히 사랑하는 것의 온도가 잘 가늠될 때 나는 변화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마가 지나면 해가 나고 누구의 청춘도 잠이 든다. 생기를 지닌 것은 변화를 담고 뱉으며 산다. 모순에 대한 감각은 마음의 변화를 읽어보라는 갈피 같은 것이다. 나의 역사를 알고 나야 새롭고 그럴듯한 삶의 목표가 떠오른다. 겨울이 끝나고 남아있던 보풀을 이제 와서 떼어낸다. 내 마음은 헤졌으나 아직 쓸만하다.